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학 예비고사 (문단 편집) == 역사 == 1960~70년대 입시는 전기대학과 후기대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기대학의 입시가 모두 마무리 된 뒤 후기대학의 입시가 시작되는 구조였다. 당시의 대학 입시는 오늘날처럼 여러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대학 중 하나의 대학에 지원을 했다. 이에 전기대학에서 불합격했다면 후기대학에 진학하거나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파일:1973.1.10. 조선일보 전기대학교 지원상황.png]] 1973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당시 1973학년도 입시에서 전기대학은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남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 세종대) 등이 있었다. 기사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서강대학교도 전기대학에 속했다. 1973학년도 입시까지는 응시 자격만을 갖춘 예비고사를 통과한 자만이 대학별 입학 시험(본고사)을 치를 수 있었다. [[파일:2. 1975.8.10. 조선일보 예비고사 반영 미미.png]] (참고로 서울대의 예시점수 680점은 68점을 잘못 쓴 것이다) 1974학년도 입시부터 예비고사는 종래의 "지원 자격"에서 실제 대학 입시에 성적이 반영되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예비고사 시험 성적과 대학별 본고사 시험 성적이 함께 반영되어 대학 입시가 치러지게 된다. 하지만 1975학년도까지는 예비고사 반영 비율이 저조하여, 당시까지에는 절대적으로 본고사에서 고득점해야 합격할 수 있었다. 1975년도 기사를 보면, 76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대부분의 대학이 반영율을 대폭 높이게 되어 예비고사가 사실상 입학을 좌우한다고 보도하고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11120032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11-12&officeId=00032&pageNo=7&printNo=9270&publishType=00020|출처]] 본고사 성적은 학생들이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예비고사 명목상 비율은 저래도, 실질적인 비율은 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파일:3. 1976.1.31. 동아일보 재수생 51%가 후기대엔 응시도 않아.png]] 1976.1.31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재수생의 실태를 보도하는 기사를 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1310020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1-31&officeId=00020&pageNo=1&printNo=16716&publishType=00020|#]] "우선 재수생의 형태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꼭 일류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학생들이고 둘째는 아무 대학이든 들어가고 봐야겠다는 학생들이다. 후자의 유형 속에는 예비고사에 조차 불합격되고 취직도 안돼 오갈데가 없는 학생들이 많이 끼여있다. 일류대학을 목표로 재수하는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학구의욕이 왕성하고 생활도 성실한 편이다. 이들 가운데는 입학시험에서 1,2점 차이로 억울하게 떨어졌거나 충분한 실력이 있으면서도 시험운이 나빠서 실패한 학생이 많다. 서울의 J학원이 작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대상 3백명 중 51%가 전기대에 낙방한뒤 후기대엔 아예 응시조차 않았고 10%는 후기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등록을 포기하고 재수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 사회에 팽배해있는 일류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후기대학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경우는 점수대가 높았다. 성균관대 법학, 상경, 한국외국어대 영문, 한양대 공대 등에는 서울대에 아깝게 떨어진 응시자가 상당수 입학하여 매우 높은 점수대를 기록했다. 당시 학번의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의 결과를 보면 성균관대가 2위를 여러번 차지하기도 했다. 1976학년도 입시에서 전기대학은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당시는 국립대였다],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남대학교 등 국립대학교들과,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중앙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건국대학교 등이었고, 후기대학은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50여개 대학이었다. [[파일:76년도 예비고사.jpg]] 위 중앙일보 "76년도 대학신입생 대학별 학과별 예시성적"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사회 283.21점, 서울대학교 인문 273.17점, 성균관대학교 법률학 272.27점, 성균관대학교 경영 270.31점, 연세대학교 경제 261.78점, 성균관대학교 행정 261.62점, 부산대학교 상경 260.18점, 연세대학교 경영 259.60점, 고려대학교 법학 259.12점, 고려대학교 행정학 258.97점이었다. 동아일보의 1977년 5월 9일자 "77년도 대학합격자의 예비고사 성적 평균치" 기사에 따르면, 전기대학으로는 서울대학교 사회 285.84점, 서울대학교 인문 278.17점, 연세대학교 경제 266.77점, 고려대학교 법과대 264.86점, 한국항공대학교 항공관리학 260.17점, 부산대학교 상경 258.53점, 부산대학교 법정계 253.66점이었다. 후기대학으로는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 279.08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270.60점, 서울산업대학교 도시행정 262.67점, 한양대학교 법학 261.60점,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 256.55점이었다. [[파일:4. 1978.5.30. 조선일보 예시성적 50% 이상 반영.png]] 1979년도 입시에서는 전국 모든 대학에서 예비고사 성적을 50% 이상 반영토록 조치를 취했다. 웬만한 서울의 주요대학들은 예비고사 성적의 반영비중이 60% 이상이었고, 심지어는 예비고사 성적 반영비중 100%의 특차 무시험(본고사를 치르지 않는) 전형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1979년도 예시부터 삼수 감점제를 적용, 삼수생 이상의 경우 최종점수에서 3점을 감점하도록 했다. 1979학년도 입시 이후 예비고사 성적의 반영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고, 전국의 주요대학에서 예비고사 성적 반영비중이 100%인 특차 무시험(본고사를 치르지 않는) 전형을 운영하게 된다. [[파일:5. 1979.12.29. 조선일보 80학년도 예비고사 배치표.png]] 조선일보의 1979년 12월 29일자 "1980학년도 예비고사 성적으로 본 대학별 합격 가능점수"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법과대 312점, 고려대학교 법과대 295점, 연세대학교 경제 291점, 중앙대학교 법과대 286점, 부산대학교 상경계 284점, 서강대학교 경상계열 277점, 경희대학교 경상계 275점, 이화여자대학교 인문사회계 271점, 건국대학교 정법대 261점이었다. 이들 모두는 전기대학이었다.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전두환의 사회 개혁 작업의 하나로 실시된 [[과외]] 금지와 맞물려서 당시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던 고액 그룹 과외의 이유였던 대학별 본고사(수학과 영어)를 금지하고 '''[[예비고사]]와 내신 성적만을 반영'''하는 이른바 '''7.30조치'''를 1980년 7월 30일에 발표했다. 학력고사는 예비고사의 과목별 배점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으며, 내신 성적 반영 비율이 확대되었다.[* 당시 [[경기고등학교]] 등 입시 명문 고교 학생들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 받는 날보다 시내 학원에서 본고사 공부를 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동급생끼리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심지어 담임 선생님 얼굴도 몰라, [[졸업식]] 날에만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과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하는 일도 흔했다. 7.30조치로 내신 반영 비율이 20% 이상이 되었고, 학력고사가 시행되면서 내신 반영 비율은 30% 이상으로 확대된다.] 1981학년도까지는 예비고사란 이름을 유지했고 총정원 1.x배수 컷오프도 있었다. 82학년도부터 학력고사란 이름을 사용하고 1.x배수 컷오프제 폐지. 81학년도 전-후기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기 종합대 = 서울대, 강원대, 경북대, 경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충북대, 건국대, 경희대, 계명대, 고려대, 동아대, 서강대, 숙명여대, 아주대, 연세대, 영남대, 원광대, 이화여대, 인하대, 조선대, 중앙대, 청주대, 효성여대, 국민대, 단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숭전대, 외국어대, 한양대, 홍익대 단과대 = 공주사대, 군산대, 마산대, 부산여대, 서울산업대, 안동대, 제주대, 한국체육대, 해양대, 가톨릭대, 감리교신대, 경남대, 국제대, 김오대, 대건신대, 동의대, 목원대, 부산산업대, 부산사대, 삼육대, 성신여대, 성심대, 세종대, 울산공대, 인제의대, 장로회신대 후기 강릉대, 목포대, 경기대, 고려신대, 관동대, 그리스도신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명지대, 상명여사대, 서울신대, 순천향대, 인천대, 전주대, 전주우석대, 청주사대, 침례신대, 한성대, 한신대 미정 광운공대, 상지대, 서울여대, 총신대, 한사대, 배재대, 대전대, 호서대, 대구한의대 본고사(대학별고사)를 거치지 않은 세대는 62학번[* 5.16 군사정변 직후 대학 입학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대학별고사를 금지시켰으나 1년만에 다시 허용하였다.]에 이어 81학번이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다.[* 1958 ~ 1961학년도에도 정원의 10%는 내신 성적만으로 무시험으로 선발했으나 전체 수험생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